본문 바로가기
jisung's 책읽기/인문학

나우시카 - 인간의 삶에 대한 연민과 집착

by jisungStory 2019. 3. 25.
반응형




나우시카  


인간의 삶에 대한 연민과 집착 



 나우시카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즈음 인것 같습니다. 아니면 더 이전 일 수도 있겠네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훨씬 더 어릴때 부터 일본 만화를 보아 왔고  텔레비전에서 ‘미래소년 코난’과 ‘빨강머리 앤' 같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나우시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전 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개봉한 것이 고등학교 때쯤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맞추어 나우시카 만화책이 출간 된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워낙 마이너 한 것을 좋아 하는 성격인지라 애니메이션을 보기도 전에 만화책 부터 덜렁 샀습니다. 그리고 만화를 보면서 질려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만화덕후 인지라 끝가지 읽기는 했습니다만 고등학생 그것도 머리가 그렇게 명석하지 않았던 학생이 그런 철학적인 내용이 담긴 만화를 한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도 그 질려버린 마음으로 안봤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와 만화속에서 그려져 있는 하야오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좀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로 부터 몇년 후 할일 없는 백수 대학생이 되어서야 저는 애니메이션 나우시카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만화책으로 인한 충격을 잊어버리고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하나 뒤적 거리다 다시 만나게 된 것이지요. 이쯤 되니 애니메이션은 그냥 제 삶의 일부가 아닐까 싶을 정도 입니다. 만화책에서 질려 버린 작품이었지만 애니메이션은 그냥 볼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훨씬 더 가볍고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내었다라구요. 그렇게 잔인한 장면도 많이 나오지 않고 상당히 교훈적으로 마무리 된 것이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정도 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야오는 왜 만화 책은 그렇게 만든 것일까? 궁금했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십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저는 삶에 찌들어 있는 직장인이 되었고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 내 삶을 갉아 먹는 듯한 기분으로 살 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기는 애매 합니다. 저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고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저의 소명인 만큼 열심히 일해서 벌어 온 돈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 속에서 다시 <나우시카>가 떠오른 것은 아마 이제서야 <나우시카>의 말을 이해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하야오는 왜 인류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일까? 하는 고등학교때의 의문이 이제서야 이해가 됩니다. 인간은 자연에 속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예 벗어나서 살아가지도 못합니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자연인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사실 저보고 저렇게 살라고 한다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겠지요. 문명의 혜택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오롯인 인간의 힘만으로 살아 간다는것은 현대의 인류에게는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 같은 것이 될 겁니다. 


 단순히 생활 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자주 아픈 편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현대 의학의 도움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야오가 말했던 자연에 속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하는 인간의 상태는 곧 저 같은 사람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의료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사람은 점점 자연으로 부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런 기술의 발전이 인류문명에 기여한 바가 크겠습니다만 전 지구의 생태계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좋은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인본주의를 벗어나는 관점에 가깝기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를 살게 해준 현대 문명을 비판 하는 것은 저의 삶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철학적 딜레마를 어린시절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할지도 모를 철학을 그렇게 쉽게 받아 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주제에 대해 저도 아직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맑은 날에도 뿌옇게 흐려진 하늘과 플라스틱 물병이 둥둥 떠다니는 강과 바다를 보면서도 저는 마트에서 최책감 없이 플라스틱병에 담긴 생수를 사다가 마십니다. 그리고 여행을 갈때는 자동차에 화석 연료를 가득 채워서 떠납니다. 기분이 나쁠때는 길가에 쓰레기를 그냥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분리 수거를 할때 버립니다만 분리수거 때마다 제가 만들어내는 쓰레기의 양에 혀를 내두르곤 합니다.  저는 지구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자기 모순 적인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하야오도 쉽게 답을 내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만화를 연재 했다가 중단했다가를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하야오의 결론은 결국 ‘살아야 하니까’ 였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주어진 현재의 삶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리고 그 다음 장편애니메이션인 ‘모노노케 히메’에서의 문장도 ‘살아라’ 입니다. 




<나우시카 7권 마지막 페이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 비록 아닐 지라도 우리는 이 힘든 하루 하루를 살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살아 내는 과정 속에서 희망도 찾고 꿈도 찾아야 합니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좀 더 나은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현재 자신의 삶마저 희생해가며 살수는 없기에 그 와중에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숙제가 남아 있고 그 남아 있는 숙제들을 하나 하나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괴롭더라도 우리의 어버이들이 그래 왔듯이 무거운 한걸음을 앞으로 내딛을 수 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이십년이 지나 겨우 이해할 수 있었던 어려운 만화책 <나우시카>였습니다. 




2019/03/23 - [하루 책읽기/하루 인문학] - 오카다 토시오의성인을 위한 교양 일본에니메이션 편


반응형

댓글